어제 아동문학작가 수업이 끝나고 뒷풀이를 했다.
뒷풀이 장소에서 오늘이 5.18이라는 얘기를 한 분이 했고
얘기는 광주 태생인 내친구 선정이의 얘기로 이어졌다.
선정이는 당시 7살 이었다고 한다.
광주시내에 군인들이 깔리기 시작한 날 엄마손을 잡고 일 보기 위해 잠시 나왔다가 군인들이 든 총의 개머리판으로 대학생들이 얻어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들과 시민군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그리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삶을 누르고 있었고 많이 자신을 힘들게도 했었다는 얘기도 했다.
내가 처음 5.18을 알게 된 건 언제지?
대학 초년생이던 나는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림과는 상관없는 사대에 들어간 나는 그림 동아리에 들거라는 굳은 결심을 했다.
학과에서 처음 자기 소개를 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던 선배 언니가 나의 관심사를
묻더니 자신이 몸담고 있는 동아리가 그림,글동아리라 했고 나를 거기로 이끌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그림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은 그림을 그리는 동아리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뒷전인 것 같고 맨날 읽는 책들이 사상서였고 때때로 중요한 사안에는
학내에서나 학교밖에서 집회나 시위를 했다.그림이라고는 운동용 걸개그림이 다 였다.
난 운동동아리에 든 것이었다.
고등학교시절 거리에 가득한 최루탄 까스를 마시며 집에 오면서 나는 생각했더랬다. 절대 데모는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참으로 못된 짓이라고 배워 익힌 나에겐 당연한 결정이었고 난 정말 최루탄 냄새가 괴롭도록 싫었다.
그런 나에게 학교 동아리 생활은 혼란 그 자체였다.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도 멀게 왔다는 생각이 들때 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학교 음악실로 모이라는 얘기를 했고 나는 그곳에서 처음 5.18관련 비디오를 보았다.비디오를 보는 내내 괴롭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아팠다.그리고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비디오 상영이 모두 끝나고 나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들을 납득해야 한다는 버거움이 날 힘들게 했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에는 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 후 나는 골수분자 운동권이 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친구들에게 광주이야기를 전했고,광주5.18공원에 가서 참배를 했다. 미국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이런저런 정부의 결정에 반한 나의 의견들은 소소한 집회참석으로 내 의견을 전달했다.안다라는 것은 많은 책임을 따르게 한다는 것을 5.18비디오를 본 후 안 것 같다.
몇년이 훌쩍지나 교내음악실에서 쉬쉬 봤던 비디오가 공중파를 탔던때를 기억한다.
내가 봤던 비디오의 장면들이 그대로 나왔고 5.18이후 극심한 정신적 외상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여줬다.참 세상이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에 대해선 달라진 세상만큼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많이 안다라는 것은 사람들을 지극히 겁쟁이로도 만드는것 같다. 참 맘에 안든다 이런거......
며칠전 신문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전두환이 보냈던 식수가 말라 죽고 있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나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나무의 탓이 아닐 것이다. 죽어가는 나무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유유자적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 놈이 있다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용서같은 이런 침묵 개나 줘라~에라이~흥분흥분.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광주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 내가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내가 있었다라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라는 생각을 한다.그런 순간 순간의 경험이 나에게 탄탄하고 건전한 원칙을 만들어 준 것 같다.그리고 그것이 5.18민주화 항쟁 비디오 관람이 시작이었다 라는 생각을 한다.원칙이 이미 이상이 되어버린 현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버릴 수없는 것은 희망인듯 하다.
아주 느리고 천천히긴 하지만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가...... 1980년 5월18일 광주가......
뒷풀이 장소에서 오늘이 5.18이라는 얘기를 한 분이 했고
얘기는 광주 태생인 내친구 선정이의 얘기로 이어졌다.
선정이는 당시 7살 이었다고 한다.
광주시내에 군인들이 깔리기 시작한 날 엄마손을 잡고 일 보기 위해 잠시 나왔다가 군인들이 든 총의 개머리판으로 대학생들이 얻어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들과 시민군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그리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삶을 누르고 있었고 많이 자신을 힘들게도 했었다는 얘기도 했다.
내가 처음 5.18을 알게 된 건 언제지?
대학 초년생이던 나는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림과는 상관없는 사대에 들어간 나는 그림 동아리에 들거라는 굳은 결심을 했다.
학과에서 처음 자기 소개를 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던 선배 언니가 나의 관심사를
묻더니 자신이 몸담고 있는 동아리가 그림,글동아리라 했고 나를 거기로 이끌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그림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은 그림을 그리는 동아리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뒷전인 것 같고 맨날 읽는 책들이 사상서였고 때때로 중요한 사안에는
학내에서나 학교밖에서 집회나 시위를 했다.그림이라고는 운동용 걸개그림이 다 였다.
난 운동동아리에 든 것이었다.
고등학교시절 거리에 가득한 최루탄 까스를 마시며 집에 오면서 나는 생각했더랬다. 절대 데모는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참으로 못된 짓이라고 배워 익힌 나에겐 당연한 결정이었고 난 정말 최루탄 냄새가 괴롭도록 싫었다.
그런 나에게 학교 동아리 생활은 혼란 그 자체였다.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도 멀게 왔다는 생각이 들때 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학교 음악실로 모이라는 얘기를 했고 나는 그곳에서 처음 5.18관련 비디오를 보았다.비디오를 보는 내내 괴롭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아팠다.그리고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비디오 상영이 모두 끝나고 나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들을 납득해야 한다는 버거움이 날 힘들게 했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에는 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 후 나는 골수분자 운동권이 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친구들에게 광주이야기를 전했고,광주5.18공원에 가서 참배를 했다. 미국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이런저런 정부의 결정에 반한 나의 의견들은 소소한 집회참석으로 내 의견을 전달했다.안다라는 것은 많은 책임을 따르게 한다는 것을 5.18비디오를 본 후 안 것 같다.
몇년이 훌쩍지나 교내음악실에서 쉬쉬 봤던 비디오가 공중파를 탔던때를 기억한다.
내가 봤던 비디오의 장면들이 그대로 나왔고 5.18이후 극심한 정신적 외상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여줬다.참 세상이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에 대해선 달라진 세상만큼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많이 안다라는 것은 사람들을 지극히 겁쟁이로도 만드는것 같다. 참 맘에 안든다 이런거......
며칠전 신문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전두환이 보냈던 식수가 말라 죽고 있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나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나무의 탓이 아닐 것이다. 죽어가는 나무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유유자적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 놈이 있다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용서같은 이런 침묵 개나 줘라~에라이~흥분흥분.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광주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 내가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내가 있었다라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라는 생각을 한다.그런 순간 순간의 경험이 나에게 탄탄하고 건전한 원칙을 만들어 준 것 같다.그리고 그것이 5.18민주화 항쟁 비디오 관람이 시작이었다 라는 생각을 한다.원칙이 이미 이상이 되어버린 현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버릴 수없는 것은 희망인듯 하다.
아주 느리고 천천히긴 하지만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가...... 1980년 5월18일 광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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